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작가가 5년 만에 쓴 2013년에 출판한 장편 소설입니다. 지방의 W시의 수도원에서 한 젊은 수사 요한이 한 여자 소희를 만나 사랑을 하고 방황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장내 나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으며 나에게 한 줄기 빛을 보여주었던 구절들을 정리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작품을 읽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텐데, 이 책을 읽으신 분들 중에도 저와 같은 빛을 느끼셨을지 궁금하네요.

 

높고 푸른 사다리높고 푸른 사다리 - 공지영 장편소설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역설하면서 가난한 자들이 왜 간나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교회, 낙태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왜 젊은 엄마들이 배 속에 든 자신의 아이를 죽일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조금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교회, 수백 명의 인명을 살상하려는 강대국의 무기 판매에 아무 경고도 하지 못하는 교회! 이혼은 죄라고 하면서 이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불행하게 사는지 보이는데는 모른 척하는 교회! 동성애가 무슨 취향인 줄 아는 교회! - P67

 

 마음과는 달리 몸은 땅속으로 녹아들듯 피곤했기에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쓰러져 침대에 누웠고 불을 껐다. 불을 끈 바로 그 순간, 환한 빛 같은 것이 어렸고, 피곤한 내 의식이 문득, 내가 불을 끄지 않은 건가, 착각하려는 바로 그 순간, 그 하얀빛이 그녀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다 의식할 새도 없이 그 하얀 얼굴이 내 갈비뼈를 열고 가슴속으로 쑤욱 밀려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약간의 통증도 동반했던 것 같았다. 나는 경험에 비추어 이게 사랑히라는 것을 알았고, 상대방이 쏜 화살이 내 가슴으로 날아오는 그 시간까지 날아오는 화살이 나를 쓰러뜨릴 것임을 뻔히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지독하게 감미로워서 지독하게 쓰게 느껴지는 고통을, 그러면 안 된다고 아주 조그만 소리로 거부하면서, 기꺼이 느꼈다. - P82

 

 그날 밤 나는 화장을 지운 그녀의 눈 밑으로 엷게 분포되어 있던 주근개 한 스푼과 갓 반죽한 밀가루덩이같이 곱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과 어리광 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데리고 내 방으로 왔다. 이번에는 불을 끄기 전에 그녀가 꽉 잡았던 내 손을 바라보았다. 내 손을 바라본 것이 언제였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소희의 손이 내 왼손이라고 치고 그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아보았다. 손은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거친 손이 부끄러워 부질없이 내 마른 손등을 비볐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내 눈앞에 둥둥 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휠 소(素) 바랄 희(希), 그녀의 이름은 하얀 희망, 그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흰 꽃들이 무리지어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 P95

 

 아침기도, 아침 미사, 낮기도, 저녁기도, 끝기도.........우리 기도 시간 다섯 번, 우리 모두의 노동시간은 솔직히 잘해야 대여섯 시간이야. 토요일, 일요일은 쉬기에 한 주에 25시간 남짓이지. 상사가 있어서 무리하게 노동을 감시하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모두가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지. 그런데 우리 모두 넉넉하게 먹어. 우리 모두 공평한 침실을 제공받고 옷과 의료를 무상으로 받아. 그러고도 남아. 그러니 만일 30시간이 아니라 60시간을 일하고도 그가 넉넉하게 먹지 못하거나 그가 주거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그가 의료비가 없어 죽어간다면 대체 누가 그걸 다 가져간 걸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P104

 

 단식을 하고 계명을 지키고 계율을 지키는 거 너무 중요하지요. 중요하지만 가끔 미카엘은 매사에 너무 열심이라서 나는 그게 걱정이에요. 하느님 나라는 공부하듯 승진하듯 고시 보듯 내 힘으로 가는 데가 아니거든요. 속세에서 1등 하듯 여기서 단식 지키고 속세에서 근무 열심히 하듯이 여기서 기도 많이 하는 건 속세의 방식이지요. 하느님 나라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기쁘게 살아내는 거예요. 복음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사는 거거든요. -P107

 

 난 뭘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면 견딜 수가 없어. 요한, 안젤로, 나는 오늘 이런 생각을 했어. 한 조각의 빵이 없어서 우는 사람이 있고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이 있어. 둘 다 지옥 속에서 사는 거지. 어쩌면 빵이 없는 형벌은 빵 한 조각이 주어짐으로써 단순하게 벗어날 수 있지만, 100조각의 빵이 지루해서 우는 사람을 구원할 길은 참으로.....참으로 없어. - P119

 

 그것도 다 좋아요.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로부터 오는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성분 함량 퍼센티지야 다 다르지만 모든 사랑에는 하느님이 계시다고 토마스 수사님이 그러셨어요. 돈이, 술이, 마약이 하느님인 줄 아는 거지요.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는 시골 아가씨 같은 거래요. 심지어 매일 밤 창녀에게 가는 가련한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기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거래요. 그러니까 영원한 것, 행복한 것, 사랑받는다는 느낌 같은 거. - P180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옥사덕이나 남미 로메로의 피살이나 유식 혹은 광주 학살 같은 것은 아직 난이도가 높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죠. 이제 악은 다른 얼굴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소리 없는 풀 모기처럼 우리를 각개격파하러 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무의미입니다. - P239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으며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구절이 곳곳에 있던 소설이였습니다. 책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도 공지영 작가도 다른 책을 읽으며 마음을 두드렸던 책으로 인해 이 책이 쓰여졌다고 하네요.

 이 소설은 하나의 구절에서 배태되었다. 2004년인가 2005년, 나는 송봉모 신부님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분의 책 속에 있던 100자도 안 되는 구절이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이 책에 쓴 마리너스 수사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신비로운 만남에 대한 구절이었다. 왜였을까.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내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그때 두 가지를 가슴속 텅 빈 파일에 저장했다. 하나는 베네딕도 왜관 남자 수도원이라는 명사였고 하나는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2013년 하나의 형상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높고 푸른 사다리
국내도서
저자 : 공지영
출판 : 한겨레출판 2013.10.15
상세보기

 

 저에게도 작은 두드림의 구절들을 포스팅에 정리하지만, 저에게도 공지영 작가처럼 나중에 무언가로 형상화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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